버스에 탄 승객들(Alisa Fjolars - pexels), 운동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릴 적부터 버스를 타면 항상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왔다. 버스마다 음량이 제각각이었고, 도중에 정류소 안내 음성이 나오면 듣고 있던 게 끊겨서 아쉬웠지만, 목적지까지 가는 게 심심하지 않았다. 학교는 봄이나 가을에 운동회 혹은 체육대회가 열렸다. 크게 울리는 음악 소리와 학생들의 즐거운 함성은 주변 동네에 긍정적 기운을 불어넣었다. 연말이 되면 귀여운 인형과 반짝이는 불빛 등으로 꾸민 산타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삭막하지만, 이런 낭만이 있어 삶이 즐거웠다.
최근 학교, 버스 등을 향해 불편함을 드러내는 일부 사람의 민원이 늘면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며칠 전 내가 자주 이용하는 SNS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나는 버스를 운전하면서 아침에 97.3Mhz KBS 제1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와 토론을 듣곤했다. 그런데 회사에서 태클이 들어왔다. 이젠 음악만 들어야하나보다.
‘최근 들어 운행 중 정치 성향의 라디오가 들리는 점에 관련하여 민원이 접수되고 있습니다. 정치 성향이 있는 라디오를 틀지 않도록 승무사원들에게 강하게 안내 부탁드리겠습니다.’ - 스레드(SNS) 이용자 Michael Kang의 글(2026.5.24.)
작년말엔 부산에서 산타 버스를 하지말라는 민원이 들어와 중단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부산 명물 산타 버스 기사님이 자비로 꾸며놓은 버스를 다 철거했다. 이유는 민원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저씨가 당근에서 알바를 구해서 버스에서 사탕까지 나눠줬고 그래서 애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좋아했는데 사라져서 아이들도 슬퍼하고 어른들도 슬퍼하고 있다. - 인스타그램 사용자 hi_na.Love의 글 (2025.12.12.)
대진여객에서 187번 버스를 모는 주형민 기사는 9년 전부터 연말이면 버스 내부를 손수 꾸몄다. 산타버스인 줄 모르고 버스를 탄 승객은 두 번 놀란다. 산타 복장을 하고서 운전하는 주형민 기사를 보고 한 번 놀라고,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는 버스 내부를 보고서 또 한 번 놀란다. 차창 밖으로 부산의 해안선과 펼쳐지면 승객은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산타 버스는 인터넷과 SNS 등으로 널리 입소문이 퍼졌다. 지역 주민은 물론 다른 지역에 사는 이들까지 12월 산타 버스 등장을 기다렸다. 이맘때면 산타버스가 언제부터 운행하는지 묻는 전화로 회사 전화기가 쉴 틈이 없었다. - <‘안타까운 굿바이’…올해부터 부산 산타버스 못 탄다> (국제신문, 2025.12.15.)
소음 민원으로 운동회를 하지 않겠다는 학교도 늘어났고, 하더라도 시간 축소에, 동네 어른들에게 사과까지 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최근 운동장 내 소음을 이유로 민원을 제기하거나 112에 신고하는 사례가 늘면서 대다수 학교에서 운동회가 사라지거나 규모가 축소하고 있다. 운동장이 아닌 강당에서 열리는 '실내 운동회'나 학년별로 1∼2교시 정도만 진행하는 '미니 운동회' 형태로 대체되고 있다. 개혁신당 천하람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운동회 소음 관련 112 신고는 350건으로 2018년(70건)에 5배로 급증했다. - <"시끄럽다" 민원에 사라진 만국기…설레는 운동회는 옛말> (연합뉴스, 2026.5.15.)
이런 민원이 갑자기 늘어난 게 아니다. 공공 서비스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조금씩 받아주니 극단적인 사례가 생기고 언론의 주목도 받았다.
적지 않은 부모가 자녀를 매개로 사적 욕망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강도 높은 학업과 훈련으로 전문성을 체득한 교사들이 제도적 규범 속에서 공적 책임을 수행하는 학교를 그들은 ‘자녀 관리 서비스 제공자’ 정도로 여기며, 교사들의 업무 전반을 방해하고 있다. 이 또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상품화된 교육의 아픈 자화상이리라. 여기에 극단의 이기주의가 결합하며 학교는 ‘자기중심주의 극복’이라는 애초 지향에 상처를 입게 되었다. - 이경직 <학부모 악성 민원…상품이 된 교육의 아픈 자화상> (한겨레, 2026.5.25.)
부산 버스회사와 부산광역시 교통 관련 부서에 폭탄 업무를 안겼던 'K'씨는 많은 수의 민원을 접수하고, 민원 대응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허점이 보이면 고소를 남발했다. 현재까지 찾아낸 민원과 고소 건만 8895건에 달했다. 민원 내용도 매번 비슷했다. '특정 회사 전체가 난폭운전, 졸음운전을 한다' 등이었다. (중략) 시 교통과의 관계자는 "K씨가 버스 정차 위치와 관련된 불만과 같은 사소한 민원을 많이 넣었다"라면서, "그런 민원을 반복적으로 올렸는데, 원래 반복 민원은 종결 처리가 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유사한 민원을 몇 글자만 바꿔서, 이름만 다른 사람으로 올려서 보내다 보니 처리하느라 고생이 많았다"라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 <부산 버스회사의 악몽... '지옥의 민원인' 결국 구속> (오마이뉴스, 2020.10.20.)
민원 자체가 나쁜 게 아니지만, 이기적인 편리함을 추구하려 남용하는 모습이 씁쓸했다. 뭘 얻으려는 걸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생각해봤을까? 이제야 언론에 알려진 악성 민원을 막으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체감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다. 그사이 많은 이가 떠나는 모습을 볼 뿐이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일선 공무원이 모든 형태의 민원을 도맡아 의무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현재의 구조에선 행정 마비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라며 “정당성 없는 괴롭힘 목적의 대량 민원을 식별하고 이를 막을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지침과 인프라가 마련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 <“내앞에 버스 세워라” 1명이 매일 민원… 못견딘 공무원 8개월 병가, 끝내 전보> (동아일보, 2026.5.20.)
타인을 침해하는 혹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진상 부모, 민원 갑질 등으로 우리 사회는 현재 거대한 민원 공화국이 되어 있다. 상급 기관들의 미비한 대응으로 인해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소송에 떨고 있고 잠재 피의자처럼 위축되었으며 방어적으로 변해 있다. (중략) 국가는 공적 영역에 대한 민원을 개인 간, 개별 현장 차원의 문제로 보는 방관자적 태도를 버리고, 갑질 및 이기적 악성 민원에 대한 국가적 공론을 형성하고 사회적 돌봄에 대해 새로운 선언을 해야 한다. - 김현수 <악성민원 대응을 위한 입법을 청원한다> (국민일보, 2026.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