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직장에서 단체로 제주도에 갔었다. 차를 타고 중산간도로를 지나는데 풀과 나무 사이로 건물이 보이는 형세였다. 차창 너머로 커다란 2층짜리 폐건물을 봤는데 이름 모를 석탑과 같이 있었다. 1층이 큰 걸 보니 관광호텔 목적으로 짓다가 버린 모양이다. 사진을 찍지 못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태안반도에 있는 거대한 리조트 건물이 공사가 중단된 채 10년 넘게 방치돼 있습니다. 한때 국내 최고의 휴양시설을 꿈꿨지만, 지금은 흉가나 다름 없는 상태인데요. 안전 문제뿐 아니라 지역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태안군은 민간 시설이라는 이유로 손을 놓고 있습니다. - <'13년째 흉물' 태안반도 리조트 방치 언제까지?> (TJB. 2024.2.14.)
대부분 가압류가 걸려 있는 등 권리관계가 복잡합니다.
<녹취> 자치단체 담당 공무원 : "개인 재산권이잖아요. 저희가 임의로 할 수가 없어요."
공사를 재개해도 문제입니다. 오래된 구조물을 그대로 쓰는 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녹취> 건축 구조 전문가(음성변조) : "철근이 콘크리트에 매립되어 있으면 오래가는데, 밖에 나와 있으면 부식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우리는 처음부터 이런 모습을 생각하고 건물을 짓지 않았다. 다양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지만, 사람이 떠나 기능을 잃어버리거나, 돈과 자원이 부족해 더 지을 수 없거나, 관리가 힘들다는 이유로 버려졌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변 환경에 미칠 영향은 점점 나빠진다.
경기도 외곽의 한 도로변, 하천 바로 옆에 흉물스러운 폐건물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8년 전 부도로 문을 닫은 제지공장입니다. 합성수지 등 사업장 폐기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넘치는 쓰레기는 건물벽을 뚫고 쏟아져 들어올 정도입니다. 문 닫은 공장에 버려져 있는 인화성 폐기물이 자연 발화되면서 화재가 끊이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중략) 그러나 뒤처리에 들어가는 많은 비용을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부담하지 못하면서 대부분의 폐공장들이 대책없이 방치되고 있습니다. 경매를 통해 공장 인수자가 나타나더라도 많게는 수십억 원에 이르는 주변 청소비용을 부담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업자들이 버티면 결국은 행정기관이 뒤처리를 떠맡습니다. - <폐공장 방치로 피해 심각> (KBS, 2004.2.7.)
더 큰 문제는 민간업체나 개인이 보유한 땅에 지었다 버린 건물이다. TBS가 보도한 경기도 내 공사중단 건축물의 사례를 들어본다.
상당수 현장은 건축주와 토지주・시행사・시공사 간 권리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합의된 해결책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용인시 공사중단 아파트의 경우에도 9개 동 모두 건축주와 토지주가 제각각입니다. 때문에 지자체들이 방치공사장에 대해 취하는 조치는 주로 안전 펜스나 안내문 설치를 명령하는 정도에 머무는 현실(입니다). - <’최고 30년’ 장기방치 공사중단 건축물, 왜 철거 못 할까?> (TBS, 2023.5.11.)
충남 홍성군에 기반을 둔 홍주일보는 전국 여러 지역의 폐건물 활용 사례를 전한 <폐건물·폐산업시설, 문화재생 가치를 담다>라는 연속 기획 기사에서 버려진 건물의 역사성, 활용 가능성 등을 언급하며 다시 살릴 방법을 찾으라 말한다.
폐산업시설을 단순히 물리적 형태의 건물로 생각하면 기능을 잃고 버려진 건축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폐산업시설에는 오랜 시간 동안 지역사회에서 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오면서 형성되고 축적돼 온 역사적, 사회·문화적인 가치가 잠재돼 있다. 시대의 흔적이 내재돼 있는 폐산업시설은 산업화 시대를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에게 과거의 경험을 전달해 주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다. - <홍성지역 폐건물, 지역의 새로운 문화·창업 공간으로> (2022.4.17.)
폐건축물의 문화관광 자원화는 도심의 흉물이 시민들의 쉼터이자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명소로 탈바꿈하는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가치가 있다. 이에 역사적 또는 건축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폐건물이나 폐산업시설 등의 건물을 단순히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지역민이 소통하고 수준 높은 문화 활동을 즐기는 공간으로 만들면 지역의 경쟁력도 높아진다. - < 예산지역 폐건축물, 주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 (2022.5.7.)
짓다가 버려진 건물을 철거하고, 기능을 다해 버려진 건물에 새로운 용도를 찾아주려면 정부와 지자체, 건물과 토지주인, 건설사, 시민사회가 모여 의논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길 게 아니라 법과 조례를 만들거나 고치고, 충분한 돈과 시간을 마련해 그런 건물의 수를 줄여야 한다. 새로 짓기보다, 버려진 곳을 제대로 활용하는 게 환경과 비용 차원에서 큰 이익이 된다는 걸 모두가 알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