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이어 쓰기> #119. 지상파 방송사의 남은 존재감 - 시사, 교양, 다큐멘터리
어느덧 11월입니다. 이번 칼럼은 지난번에 이어 TV 방송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여러 부분을 인용했지만 간만에 계획하고 긴 글을 쓰니까 기분이 좋네요. 이번 글은 제목 그대로 지상파 방송사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사, 교양, 다큐멘터리에서 여전히 우위에 있지만, 이대로 머물다간 유료방송과 뉴미디어 플랫폼에 자리를 넘겨줘야 할지 모릅니다. 지상파 방송사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남아있길 바랄 뿐입니다. 2021년 10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국정감사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의원들은 양승동 KBS 사장을 불러놓고 한참 인기몰이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을 언급하며 KBS도 한류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생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조정식 의원은 양승동 KBS 사장에게 '오징어 게임'을 봤는지 묻고는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KBS가 그런 역할을 선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성중 국민의힘 의원은 "작품은 우리가 만드는데 큰돈은 미국(넷플릭스)이 싹 다 가져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며 "KBS는 왜 '오징어 게임' 같은 콘텐츠를 생산하지 못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양 사장은 "'오징어 게임'은 KBS 같은 지상파가 제작할 수 없는 수위의 작품이다. KBS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KBS와 KBS계열사가 공동 출자해 설립한 드라마제작사 몬스터유니온을 언급하며 "(몬스터유니온을) 대형 스튜디오로 키우고 지상파TV와 온라인 콘텐츠를 구분해 제작하는 방식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지상파 방송사의 인기가 나날이 준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여러 권력에 취약한 지배구조, 정권이나 대주주에 따라 달라지는 보도 논조는 말할 것 없지만, 드라마와 예능 등 인기 콘텐츠는 유료 방송과 OTT 등 뉴미디어 플랫폼에 밀리는 중이다. 스포츠 중계도 마찬가지다. 국내외 볼만한 종목의 경기나 대형 행사 중계권도 그렇게 자리를 내주는 모습이다. 그런 처지에 세계 여러 나라를 노릴 콘텐츠를 만들라니 정치인들이 미디어 업계의 사정을 알고 건의했는지 의문이다. 물론 자국의 지상파 방송이 갈수록 외면당하는 걸 반가워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인기 콘텐츠는 그만큼의 돈과 시간, 인력과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시청률과 VOD 재생수, 광고 수입에 기대는 현실에서 지상파 방송사는 존재감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한 사람, 집단이 모든 걸 잘할 수 없다. 못하는 걸 조금씩 보완하고, 잘하는 걸 더 키워야 한다. 다행히 사람들은 지상파 방송사의 시사, 교양,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가지고, 좋게 평가한다. * KBS, MBC, EBS, SBS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공영 방송사인 KBS와 MBC는 이 분야에서 장수, 인기 콘텐츠를 꾸준히 내고 있다. KBS는 전국의 음식을 다루는 <한국인의 밥상>, 여러 동네를 다니는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 등에서 꾸준히 선전 중이다. “백발의 '국민 배우'는 힘에 부친 여정을 사명감으로 버텼다. 최불암에게 밥상은 "역사를 내놓는" 일이다. 선조들이 일제 강점기 등을 견디며 지켜낸 밥상엔 1,000년이 넘는 우리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중략) 역사의 풍파로 가난했던 밥상엔 어머니의 지혜가 녹아 있었다. 최불암은 "여러 곳을 다니면서 받은 밥상 대부분이 어려운 시절에 가족을 먹이기 위해 어머니가 궁핍한 식자재를 갖고 지혜를 짜내 만든 것들이었다"며 "그런 어머니들에 대해 애잔한 마음도 들고, 그 바탕에 깔린 역사에 대해 어른으로서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껴" 이 방송을 10년 동안 지켰다고 했다.” - <10년간 지구 9바퀴… '한국인의 밥상' 소개한 최불암을 울린 음식은?> (한국일보, 2021.1.6.) “배우 김영철은 매주 목요일 오전 7시면 어김없이 길을 나선다. 온종일 쉬엄쉬엄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작은 것들의 소중함, 가까이 있는 것들의 위대함"을 발견한다. 길 위에서 만난 평범한 이웃들의 소박한 이야기를 펼쳐놓고, 슬며시 위안도 건넨다. 김영철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내걸고 2018년 11월 시작한 도시 기행 다큐멘터리 '동네 한 바퀴'가 어느덧 100회를 앞뒀다. 예능 프로그램이 각축전을 벌이는 토요일 저녁 시간에 자리잡고도 평균 7~8%대 시청률을 올리면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00회... "동네 속에 가장 소중한 것 있어"> (한국일보, 2020.12.10.) MBC는 <PD수첩>에서 사회의 민감한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준다. 오랜 역사가 있는 탐사보도 프로그램이지만, 최근 다루는 주제들은 훨씬 과감했다. “최근 논란의 중심에 있는 주제를 잇달아 다루면서 같은 날 방송되는 월화극보다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PD수첩'은 지난달 24일과 31일에 걸쳐 고(故) 장자연의 죽음을 둘러싼 내용을 보도했다. 장자연이 생전 수많은 접대 자리에 강제로 불려 나갔다는 사실과 그녀가 남긴 문건 등을 공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12일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PD수첩'의 '故 장자연' 1부는 시청률 4.5%를 기록해 같은 날 밤 10시에 방송된 MBC TV 월화극 '사생결단 로맨스' 3~4회(2.7%-3.1%)보다 높았다.” - <지상파 시사교양 '인기'…식상한 드라마·예능보다 낫네> (매일경제, 2018.8.13.) 다큐멘터리는 두 방송사가 프로그램 강화를 선언하고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자랑거리다. KBS는 <환경스페셜>, <역사스페셜>을 차례대로 부활시켰고, <다큐 인사이트>, <다큐On>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는 중이다. 3부작 다큐멘터리 ‘키스 더 유니버스’는 증강현실을 통해 우주를 다루었는데 제작 기간이 2년이 걸렸다. 한편 오랜 역사를 가진 방송사답게 영상 아카이브를 이용한 다큐멘터리도 볼거리다. ‘모던 코리아’ 시리즈는 내레이션 없이 옛날 영상의 일부 장면, 인터뷰, 적절한 설명이 담긴 자막을 조합해 볼거리와 배울 거리를 동시에 전해주었다. MBC도 <다큐플렉스>에서 다양한 주제, 유연한 방식을 선보이는 중이다. “지난달 방영한 ‘오은영 리포트’는 렉처멘터리(lecture+mentary) 형식으로 영·유아 자녀를 둔 부모들의 성교육 고민을 해소해 SNS상 반향을 불렀다. 1980~2002년 방영한 최장수 드라마 ‘전원일기’ 출연진을 만난 ‘전원일기 2021’과 이어진 청춘다큐 시리즈(커피프린스1호점, 거침없이 하이킥)는 레트로 열풍 속 옛 콘텐츠를 소비하는 젊은 세대와 이를 추억하는 세대 모두에게 공감을 샀다는 평가다.” - <다큐멘터리는 공영방송을 구할 수 있을까> (미디어오늘. 2021.11.3.) 같은 성격의 방송사인 EBS는 ‘만인의 영상창고’라는 온라인 커뮤니티 속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의 교양,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EBS 다큐프라임>, <세계테마기행>, <한국기행>, <극한직업>은 인터넷에서 높은 순위에 오르고 있고, 짧은 시간에 간단한 지식을 전하는 <지식채널 e>는 ‘짧은 동영상’ 콘텐츠에서 최고로 평가받는다. “트위터 이용자들은 “다큐에 관해서는 EBS가 ‘완소’ 채널이다”라고 추켜세웠다. 그 비결로 끈질긴 문제의식을 꼽았다. 다른 방송사에서는 특정 아이템, 즉 소재를 고민하는 데 비해 EBS는 방향을 고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근본적인 화두를 던지고 끈질기게 매달려서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EBS 다큐, 왜 강한가?> (시사iN, 제169호) 민영 방송사인 SBS도 <그것이 알고싶다>로 한몫하는 중이다. 심령 과학을 다루는 프로그램으로 출발했지만, 정치와 사회를 다루는 시사고발로 방향을 바꾸면서 많은 시청자를 확보하는 중이다. 여기서 다룬 이슈들은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시사고발의 본질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받는다.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의 진실>(2016.10.20 방송)은 그런 점에서 시사 프로그램의 ‘정상화’ 가능성을 보여준 일종의 ‘사건’이다. 이날 <그것이 알고 싶다>는 시사 프로그램이 지녀야 할 ‘기본기’ - 검증과 추적 그리고 사안의 본질 파헤치기에 충실했다. 제작진은 고 백남기 농민에게 발포했던 물대포의 실제 위력을 알아보기 위해 당시 상황과 비슷한 조건에서 비교실험을 진행했다. (중략) 검경이 논란을 부채질했던 백남기 농민 ‘사인’에 대해서도 <그것이 알고 싶다>는 전문가 검증에 나섰다. (중략) 이 사안의 본질적인 측면 - 백남기 농민이 왜 민중총궐기에 참여하려 했는지, 10만 여 명의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여 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외치려 했는지를 <그것이 알고 싶다>는 외면하지 않았다.” - 민동기 <대한민국 시사교양 PD, 아직 살아 있습니다> (PD저널, 2016.10.23) 맛보기 프로그램으로 출발했다가 두 번의 시즌제를 거쳐 정규 편성 중인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도 화제다. 현대사 속 사건과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전하는 방식으로 다루는 방식인데 친근하게 느껴지는 대화 형식과 다루는 주제의 중요성을 모두 잡고 있어 신선함과 감동을 전한다. “‘이태원 살인 사건’을 방송했을 때 일이다. 갑자기 웨이브(지상파 3사와 SK텔레콤이 만든 OTT 플랫폼)에서 ‘그것이 알고싶다’ 2015년 에피소드와 2009년 개봉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의 시청 시간이 급증하며 차트 순위권에 진입했다. 방송 이후 관련 영상을 찾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시청이 이어진 결과였다. 그동안 사건을 다루는 프로그램들은 사실 나열식 전달, 취재, 인터뷰 같은 플롯이 주를 이뤘다. 이는 젊은 세대에겐 ‘어른들이나 볼 법한’ 시사 프로그램의 전형적인 포맷이다. 하지만 ‘꼬꼬무’는 다른 선택을 했다. 이야기의 형식을 취한 것이다. 마치 친한 친구끼리 ‘그거 알아?’ ‘그런 일이 있었대’ ‘어머, 말도 안 돼!’ 같은 대화 방식으로 역사적 사건을 다루다 보니, 시청자들은 절로 이야기 속에 빠지게 된 것이다.” - 김경란 <[일사일언] 꼬리에 꼬리를 무는 TV> (조선일보, 2021.11.11.) 소개가 길었지만, 지상파 방송 4사는 시사, 교양, 다큐멘터리를 강화해 존재감을 살리려 애쓰는 중이다. 어느 언론 기사 속 방송 관계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채널이 다양화되면서 드라마나 예능은 시청자층이 세분됐다. 지상파, 종편, 케이블 방송사 각각 타깃이 다르다. 종편과 케이블이 드라마와 예능에서 경쟁력을 갖게 되면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시사교양은 지상파에서만 방송되기 때문에 시청률이 유지되는 것이다." <KBS는 왜 '오징어 게임'을 못 만들어?> (TBS <정준일의 해시태그> 74회) 위 글에 국정감사 관련 영상을 링크하면서 찾은 영상 한 편을 공유합니다. 지상파, 언론사 모두 위기라는데 한번 보시고, 생각할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응상(a.k.a. Blueman) 부족한데 자존심이 강하고 엉뚱한 사람 꿈과 희망을 믿고 배우며 세상을 보려는 사람 누군가에게 친근하고 도움이 되려는 사람 메일 : blueman1988@daum.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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